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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역사공부방

※한산도대첩 위치는?

by reply1988 2025.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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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대첩이 발생한 위치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이 한산도 대첩은 한산도 '화도' 옆의 해상에서 벌어졌다고 말합니다.저는 화도 옆 해상이 아닌, 그보다 남쪽인 '용호도', '비진도', '학림도' 인근 해상에서 벌어졌다고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한산도 해전의 기존 장소는 '화도' 주변 해상이며,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기존 명량해전 위치

 
필자는 한산도 대첩의 위치를 조금 더 남쪽인 용호도, 비진도, 학림도 인근 해역으로 추정했습니다. 아래 그림입니다. 

 

 

 

한산도 대첩의 위치를 한산도 남쪽 해역으로 추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학림도비진도용호도앞 해역은 넓습니다.
 
화도 옆의 해상은 비좁고, 주변에 섬이 많아 당시로써는 대형 전함인 판옥선이 수척은 쉽게 기동은 할 수 있어도, 50척이 넘는 판옥선과, 70척이 넘는 왜선이 충돌을 해서 전투를 벌일만한 해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화도와 미륵도 사이의 바다는 겉으로 봐서는 견내량보다 넓어 보이지만, 지도를 더 크게 하면 견내량보다 조금 더 커질 뿐 비좁은 해역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둘째는 선조실록과 와키자키의 기록에는 해전은 "한산 앞바다"에서 벌어졌습니다.
 
<중략....>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선조실록)>
 
<중략....>판옥선이 막 해협을 지나 넓은 곳으로 나아갔다. 한번에 키를 돌려 잡고는 큰 배를 양쪽으로 벌려 세워 아군의 배를 둘러쌌다.<와키자카>
 
선조실록에는 왜적들을 한산 앞바다로 끌어내어 해전을 치렀다고 기록하고 있고, 와키자카도 넓은 곳에서 해전이 벌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화도 옆 해상은 지리적으로나 위치상으로 봐도 내양(內洋)이라고 봐야 합니다.
 
※풀이
선조실록을 다시 풀어 보겠습니다. 필자의 사적인 생각도 포함되어 있으니, 너그럽게 이해 부탁드립니다.
 
7월 6일에 순신이 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永登浦)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협착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참고:선조실록)
 
조선군은 7월 6일, 약 70여 척의 왜선이 견내량에 정박해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시점은 7월 7일입니다. 7일에 왜군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기에 그 날의 움직임은 알 수 없습니다. 
 
7월 8일 조선 수군은 힘껏 노를 저어 바다 한가운데까지 나아갔다고 합니다. 이 구절에서 '바다'는 넓은 공간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조선 수군이 한산도 근처 해역까지 진입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선발대로 추정되는 왜선은 조선 수군의 강한 기세를 느끼고 급히 노를 저어 퇴각했으며, 기록에 의하면 모든 조선군이 추격에 나섰다고 합니다. '모든 군사'가 추격에 나섰다는 것은 50척 이상의 판옥선이 적을 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 수군이 일제히 왜선을 추격했으나, 왜선 70여 척이 내양에 진을 치고 있었다는 상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조선 수군은 약 70여 척이나 되는 왜선을 유인하기 위해 좁은 견내량을 통과하지 않았다고 판단했습니다. 견내량은 좁기 때문에 50척 이상의 판옥선이 동시에 지나갈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일부 판옥선들이 견내량으로 진입해 왜선을 화도 근처까지 유인하는 장면이 종종 연출되지만, 실제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봅니다.
 
7월 7일, 왜선이 견내량을 지나 '해간도' 섬 부근에 정박했다는 필자의 가설이 맞다면, 지세가 협소한 '화도'가 아닌 넓은 해역인 '한산도' 남쪽으로 왜선 70여 척을 유인하고, 그곳에서 학익진을 펼쳐 승리했던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설명으로 『와키사카기(脇坂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와키사카기(脇坂記)』에는 “마침 해협에 적선(조선 수군의 배) 4~5척이 떠 있는 것을 보고는 조총을 쏘며 한 시간 정도 싸움을 걸어, 조금 후퇴하는 적선과 틈을 두지 않고 공격해서 3리 정도 추격했다”
 
해협에 조선 수군의 배 3~4척이 떠 있었다고 했는데, 이 해협이 구체적으로 견내량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넓게 생각하면 미륵도와 한산도 사이의 바다도 해협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명량해전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명량 해협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한쪽은 해남 육지이고, 다른 한편은 진도 섬입니다.  육지가 무조건 있어야만이 해협의 조건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명량해협과 미륵도와 한산도 사이의 바다를 비교해 보면, 명량 해협은 간척지를 제외한 폭이 넓으면 대략 1.5km 이상이고, 미륵도와 한산도 사이의 폭은 좁으면 1.3km, 넓으면 2km가 조금 넘습니다.  그리고 길이도 어느정도 일정한 수준을 갖추고 있습니다. 명량해협의 길이는 울돌목을 제외한 3.5km수준이고, 미륵도와 한산도 사이의 바다 길이는 화도에서 시작하면 5.8km쯤 됩니다. 
 
그리고 사료에서 와키자카 수군이 3~4척이나 되는 조선 수군을 3리나 추격했다고 했습니다.
와키자카는 일본인이므로 당시 일본인이 생각하는 거리로 계산했을 것입니다. 1리는 조선 입장에서는 8~10리에 해당할수 있습니다. 일본인이 생각하는 1리와 조선인이 생각하는 1리와는 차이가 있었을것입니다. 
그러면 3리는일본인의 입장에서는 30리가 되므로 길게 잡으면 12km가 됩니다.견내량 아래인 해간도 인근에서 일직선으로 남쪽으로 12km의 선을 그으면 용호도, 비진도, 학림도 해역에 이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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